18세기 청에 온 선교사들은 동양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천주교 서적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기술서까지 한문으로 번역해 소개했다. 새로운 서양학문은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도 전해졌다. 서학은 주자학만을 중시하던 조선사회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성호 이익을 필두로 한 실학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익에게 학문이란 실사구시의 목적을 위한 도구였고, 사회제도는 개혁이 필요한 낡은 관습이었다.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모시는 남인 계열의 학풍에 속해있던 학자 중에 이벽은 일찍부터 서학에 관심을 가졌다. 1783년 겨울, 이벽은 정약용의 자형인 이승훈을 설득해 청 사행길에 동행하게 했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대로 청에서 북경 남당교회를 찾는다. 신부들과 필담으로 대화하며 천주교 교리를 익히길 40여일 만에 이승훈은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는다. 그리고 그가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천주교 교리서들로 공부를 마친 이벽도 세례를 받는다. 이벽이 정식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공동체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지식인을 상대로 전교에 힘쓰던 이벽은 지금의 명동지역인 명례방에 신앙 근거지를 마련했는데, 당시 명례방은 주로 중인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벽의 집에는 양반만 출입이 가능했지만, 명례방 출입에는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었다. 어려운 한문 교리서의 한글 번역본을 보급하자 신분고하를 막론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고, 천주교는 급속하게 확산된다. 명례방 신앙집회는 평등사상이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100년 후 명례방 자리에는 한국 천주교의 요람인 명동성당이 서게 된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03명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교황은 한국 천주교가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발생했음을 강론했다. #성호 #이익의 #실학운동#제자 #이벽과 #이승훈 #천주교 #세례#명례방 #신앙집회#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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